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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리뷰/문화생활

[영화 리뷰]레미제라블 - 모든 대립의 중심에서 던지는 빅토르 위고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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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에 프랑스에서 태어난 한 소설이


뮤지컬이 되고, 연극이 되고, 영화가 되어


1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호흡을 잃지 않고 지속해왔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Canon, "고전"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발장"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의 원제는 "레 미제라블"인데,


언제부터인가 "장발장"이란 이름 대신 원제가 번역 없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비참한 자들"로,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주인공들은 이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우리에게 이 작품은 그토록 특별하게 여겨지는가?"이다. 어째서 


보잘것 없는 인물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이 작품을 사람들은 그토록 특별하게 여겨 "고전"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등극시켰을까.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가지는 "시대를 초월한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경은 변할지 몰라도, 사람이 사는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태어나서, 짝을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늙고, 죽어간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사회"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우리가 고전이라 칭하는 작품들은 바로


"사람", 그리고 "사회"의 본질을 건드린다.


이 영화를 보며 언론이 [18대 대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힐링 영화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이야기의 근간이,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과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게 때문일 것이다.


비록 이 이야기가 150년 전의 사회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지라도.




[법과 도덕의 대립]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진통을 호소한다. 그녀는 이제 임신 9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다. 놀란 당신이 아내를 차에 태우고 80km 제한속도인 도로에서 시속 120km로 


질주하여 병원으로 갔다. 그 도중 뒤에서 따라붙은 교통 경찰이 당신의 차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만, 


당신은 차를 세워 교통경찰과 실갱이를 벌일 시간조차 아깝다. 경찰은 결국 병원에 도착한 당신의 


차를 둘러쌌다.


당신이 차에서 내리고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자 경찰은 당신을 그 자리에서 체포한다. 당신이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들은 당신을 "범법자"로 취급하며, 당신은 고통에 신음하는 아내를 차에 


내버려둔 채 경찰차에 실려 끌려간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1. 당신은 당신의 행동이 도덕적이었다고 생각하는가?


2. 당신은 당신의 행동이 법을 위반하였으며, 이에 대해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3. 도덕적으로 경찰의 행동은 옳은 것인가?



위의 사건은 2009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운전자와 운전자의 부인은 흑인이었으며, 


경찰은 운전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이는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미국을 '법치국가'로서 본받아야 할 예로 많이 언급한다. 하지만 위의 사건을 보면, 과연 


'법'이란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정의'와 얼마나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장발장은 '법'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자벨의 말에, 자신이 '법의 노예'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당시의 프랑스는 그랬다. 법은 수많은 노예를 양산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바로 그 시기의 시대적 문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적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는 신흥 세력인 부르주아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투표권을 얻지 못한 


부르주아들의 힘을 등에 업은 민중들의 봉기였으며, 실제로 왕과 귀족을 처단한 이후 민중들에게 


돌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왕"과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권력의 이양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이어지게 되는 바리케이드 혁명을 통해 아주 천천히 권력은 민중들에게도 


돌아가기 시작하지만, 그것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 많은 이들이 


추가적으로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법'이란 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을까?


언제나 법은 '사회의 유지'에 초점을 둔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들여다보면, 루소는 모든 '법'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가치적으로 '왕정'과 '민주주의' 사이에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의 문체는 '왕정'이 좀 더 낫게 느껴질 


정도라고 생각할 여지를 준다.



영화 속 '자벨'은 '법'을 상징한다. 비판의식 없이 법을 집행하는 그는 자신이 행하는 법이 '정의'라고 


굳게 믿으며, 장발장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그 법 속에서 처벌하려는 '냉정한' 시선을 가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법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융통성의 부재"이다.



법은 절대적인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며,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법은 예외를 


두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 혹은 '도덕'과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즉, 


법은 '사회'를 지키는 도구이지,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헌법'이라는 것을 법의 


'상위법'으로 두지만, 이 '헌법'이 지금과 같이 보편적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미국에서 여성의 투표권은 1906년에 인정되었다). 




[구약과 신약의 대립 - 예수는 혁명가인가?]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잠시 카톨릭이라는 종교 이야기로 넘어가보고자 한다.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에는 


두 권의 성경이 있다. 


바로 "구약"과 "신약"으로, 구약은 예수의 탄생 이전을, 그리고 신약은 예수의 탄생 이후를 보여준다


(카톨릭에서 성경은 말 그대로 종교적 성격이 강하지만, 중동과 관련된 역사학자에게 구약과 신약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훌륭한 역사기록서의 역할을 한다. 유대인의 12지파가 보유한 


자료들을 토대로 엑기스를 모아 편찬된 것이 구약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이 제법 많다.


"왜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하나님)의 모습은 이토록 다를까?"


그도 그럴 것이, 구약의 신은 용서라는 것이 없다. 이교도는 무조건 죽인다. 가축까지 죽인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자비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구원과 용서란 불필요한 단어이다. 오직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들만을 위한 신이며, 그 유대인들 마저도 자신의 규율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하지만 신약의 신은 다르다. 구약에서 언급되는 수 많은 규율을 깬 자를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토대로 수용한다. 자신의 뺨을 때린 자에게 반대쪽 뺨을 내밀라 하고, 나를 해한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친다. 간음한 자를 몸을 던져 지켜주고, 살인한 자를 용서하며 자신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말한다. 구약의 신이 확립한 '법'은 신약의 신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며, 단 두 가지, 바로 "용서"와 


"사랑"이라는 가치만을 남겨놓는다.


여기까지 오고 나면, 이 신약과 구약의 대립이 이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법을 


상징하는 자벨,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상징하는 장발장. 이들의 대립을 통해 이 작품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자벨의 자살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해석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바리케이드, 그 너머로 가는 방법]


사회는 변한다. 역사가 보여준다. 소수에게 밀집되어있던 권력과 부는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가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가 '사회의 성숙'으로 인한 발전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술의 발전에 따른 '초과 


잉여물의 혜택'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꿈꾼다. 그 행복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저 헌법이 말하는 


문서상의 단어가 아닌, 정말 삶 속에서 구현되는 가치로서 말이다.




엄밀히 말해, 바리케이드 혁명은 실패했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스스로 왕정을 복고했으며, 향후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투쟁해야 했다. 트로츠키파를 위시한 코뮤니즘 추종자들은 이 방법이 


필수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라 여긴다. 실제로 프랑스는 수 많은 피를 통해 현재의 사회를 구축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프랑스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모 정치당이 들으면 기절할만한 


복지정책들이 기저에 깔린, 14억 이상의 수익자에게는 75%의 세금을 부과하자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그런 국가 말이다. 


하지만 반대의 예 또한 존재한다. 바로 이웃나라인 영국은 스스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그 이전에 


스스로 국민대헌장을 발표하였고(마그나카르타), 또 지도층 스스로 입헌을 이루어냈다.




자유와 평등이 시작된 역사는 짧다. 하지만 그 준비기간은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년 전에도, 또 1000년 전에도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존재했다. 단지 그 발걸음이 조금 느렸고, 또 더디었을 뿐.



우리 나라보다 100년 쯤 민주사회를 위한 노력을 빨리 시작한 프랑스.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 "레미제라블". 이 작품 속에서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다소 


좌절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수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 또한 그 여로 속의 한 점이 된다.


그 한 점의 단면을 '표본'처럼 그린 작품, "레미제라블"


이 작품은 결국, 오랫동안 숨쉬는 고전이 되었다.


그리고 100년 후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느 '이정표'가 되는 물음을 제시할 것이다. 






2013년 1월 10일


Written by Tam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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